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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엽동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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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의글

2015-05-12 01:03

부활 6주 화요일

2,195
김오석 라이문도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요한 16,7)

 

내 눈 앞에서 펼쳐지는 이별 혹은 사별 때문에 우리는 더 큰 희망의 메시지, 사랑의 기억을 놓치는 우를 범하기 쉽다. 사랑하는 부모님, 그러나 연로하신 그 분들 분명 나보다 먼저 나를 떠나 하느님께 돌아가실 가능성이 높다.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부모님만 그런 것 아니다. 만남의 인연은 그 누구라도 결국 떨어져 있음의 상태로 바뀔 가능성이 많고, 새로운 만남이 그 자리를 메우며 은총으로 다가오겠지만, 장구한 시간의 연속선상에서 보면 그마저도 모두 영원에로 회귀함을, 어쩌면 무()로 스러지게 마련이다.

 

있을 때 잘 해!”라는 말은 이런 관점에서 지당하고 옳은 말이다. 사랑의 추억, 기쁨의 시간, 행복했던 순간들을 잘 갈무리해 둘 필요가 있다.

 

육을 지닌 존재로서 예수님을 언제까지나 붙들 수는 없다. 천년만년 함께 지내면 좋으련만 그것은 제자들의 생각일 뿐이다. 시공간에 제약을 받는 모습으로 그렇게 남아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떠남은 새로운 차원을 열어준다.

예수님은 당신의 떠남으로 모든 사람이 언제 어디서나 당신과 함께 할 수 있도록, 특히 당신의 지상에서의 육적 현존을 직접 보지 않고도 믿는 우리들을 위하여, 보고 만질 수 있는 당신의 육신 대신에 당신의 영, 보호자 성령을 약속하신다. 육신의 시력을 잃었으나 마음의 눈이 열려 더 아름다운 세상을 만나게 되었노라는 증언과 상통한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며, 고백한 것을 삶으로 살아내는 모든 사람에게는 보호자 성령이 함께 하신다. 승천하시어 볼 수 없는 예수님이 그 사람 안에 사신다는 말이다.

 

우리는 바야흐로 성령의 시대, 교회의 시대를 살고 있다. 육체를 지닌 예수님의 현현을 기대하고 보기를 애쓰고 기도하는 어리석은 신앙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보이지 않지만 확실하게 역사하시는 성령의 작용에 온전히 의탁할 수 있다면 좋겠다. 이것이 오늘날의 믿음이다. 성령께서는 우리 양심의 방에 거처를 두고 계신다. 떠나간 예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영, 보호자 성령을 선사하셨다.

 

믿음으로 그 성령께서 이 세상을 지배하시도록, 나를 이끄시도록 우리 마음을 활짝 열어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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