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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엽동성당

말씀과 함께, 공동체와 더불어

사제의글

2015-05-11 01:10

부활 6주 월요일

2,220
김오석 라이문도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요한16,2)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하느님을 믿는 사람을 내쫓고 죽인다? 가능한 일인가? 그렇다. 당시 대부분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호칭하고 해석하는 것을 신성모독이라고 하며 질색을 했고 그래서 눈에 불을 켜고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박해했다.

 

박해하는 믿는 사람이 옳으냐, 박해받는 믿는 사람이 옳으냐의 문제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 믿음의 내용, 믿음의 본질을 드러내 따져보아야 할 일이다.

 

다행히 박해받는 쪽이 잘못이라면 별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박해받는 쪽이 잘못이 없고 오히려 더욱 하느님 뜻을 잘 헤아리고 있고 합당하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시궁창에 빠진 자가 목욕탕에서 때 벗기고 나오는 사람에게 더럽다고 욕하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해지는 것일까? 일이 그렇게 틀어질 수 있는 것은 무지(無知) 때문이다. 하느님을 안다고 말하지만 하느님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모르는 이유는 하느님을 제대로 섬기지 않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섬긴다고 말하면서 실은 자기 자신을 섬긴 결과 그리 된 것이다. 자신의 생각, 판단, 전통과 교리와 믿음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착각하는 것이 자기를 섬기는 것이고 이를 통해 어이없는 일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 물밀 듯이 우리 삶 한 가운데로 파고드는 디지털 미디어와 첨단 과학 기술로 세상의 변화를 따라가는 것이 힘겨운 우리들의 현주소다. 어쩌면 나는 이미 이런 변화에 적응하기를 포기하고 도태되는 길을 선택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내가 모르는 새로운 가치들이 생겨나고 있다는 뜻이다.

 

다양한 교육과 세상 경험으로 얻은 지식을 치열한 사유의 과정을 거쳐 정립한 나의 주장과 가치관이라 하더라도 그것의 부족함과 오류의 가능성에 대해 관대한 마음을 지녀야 한다. 그럴 때 아직 내 인생에서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진리의 보물을 캐낼 수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하느님과 예수님에 대한 나의 신앙적 관점이나 신학적 관점을 고정된 어떤 것으로 박제화하지 말아야 한다. 사실 인간은 하느님에 대해 알지 못한다. 분자가 무한대(하느님)인 분수는 분모가 아무리 큰 수(인간)라 하더라도 무한대가 답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었으면 한다.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겸손한 태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인간은 하느님을 발톱에 낀 때만큼도 모른다.

 

오늘 나는 어떤 새로운 경험을 할 것인가? 그 경험을 통해 나는 어떤 소중한 보물을 캐낼 수 있을까? 나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안겨줄 사람을 그리워하며, 약간은 긴장되고 그러나 설레는 만남이 이뤄지는 오늘이 되길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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