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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엽동성당

말씀과 함께, 공동체와 더불어

사제의글

2015-04-29 23:47

부활 4주 목요일

2,239
김오석 라이문도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요한 13,16)

 

너무나 당연한 말씀이다. 누구나 아는 상식이고 질서다. 그런데 이것이 뒤바뀌면 볼썽사나운 꼴불견이 되고 만다. 종이 주인 노릇을 하려들고, 아들이 아버지를 윽박지르고, 제자가 스승을 욕하고 험담하는 세상은 생각만 해도 끔직하다. 파견된 사람이 파견한 사람의 뜻을 무시하고 제 맘대로 한다면 그 사람은 이미 파견된 이유를 상실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더 이상 그 자리에 존재할 이유가 없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헌법 1) 선출 혹은 모든 임명직의 국가 권력은 국민의 공복(公僕)이다. 국민이 주인이고 국가 권력은 국민의 종이다. 국가 권력은 국민의 안전을 지켜야 하고, 국민을 위해서 봉사할 때 그 의의가 있다. 국가 권력이 국민과의 약속을 어기고, 거짓말하고, 안전을 지켜주지 못하고, 부패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억지 부리고 견강부회할 때, 그런 국가 권력은 이미 죽은 것이다. 존재할 이유가 없다. 사라져야 한다.

 

오늘의 말씀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다음에 하신 예수님의 당부다. 우리 역시 예수님으로부터 파견된 사람들이다. 예수님보다 더 부유하게 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 예수님이 받으셨던 대우보다 더 나은 대우를 기대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예수님이 무시당한 것보다 더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예수님보다 더 편안한 인생을 살려고 발버둥 칠 필요 없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보다 더 부유하고, 더 대우받고, 더 인정받고, 더 편안하게 사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는다면 방향이 잘못 되었다. 존재할 이유가 없다. 역시 사라져야 한다.

 

왜냐면 그렇게 사는 것은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겼던 것처럼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배신한다고 하는 것이 어떤 흉악하고 대역무도한 죄를 저질러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욕심, 교만, 게으름이 바로 배신의 씨앗이다.

 

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요한 13,26) 유다의 배신을 알고 있던 예수님의 말씀이다. “제 빵을 먹던 그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들었습니다.”(요한 13,18) 배신을 예감한 예수님의 성서인용(시편41,9)이다.

한 식탁에서 빵을 나누고 마주 앉아 음식을 나눈다는 것은 우정의 표시이며, 생명을 함께 나눈다는 운명공동체의 의미가 있다. 이렇게 친밀한 사람으로부터의 배신은 그래서 더 아리고 비통하다.

 

우리는 날마다 예수님의 식탁에서 그분이 주는 생명의 빵을 받아먹는 예수님의 제자요 벗이다. 배신의 씨앗이 내 안에서 배태되지 않도록 삼가 조심할 일이다. 수난당하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 그 분이 파견하신 분이고 우리는 파견된 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그분이 스승이고 우리가 제자다. 그분이 주인이고 우리가 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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