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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엽동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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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의글

2015-04-28 00:43

부활 4주 화요일

2,127
김오석 라이문도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0)

 

하느님 아버지의 영역을 그림으로 그릴 수 있을까? 하느님의 영이 미치는 곳은 어디까지일까? 우주만물, 일월성신의 그 바깥(혹시 있다면)까지 닿지 않는 곳이 없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듣고 영원한 생명을 얻은 양들을 하느님의 손에서, 그리고 하느님과 하나이신 예수님의 품에서 빼앗아갈 수 있는 자는 없다. 귀한 물건을 그것을 담을 수 있는 보다 큰 어떤 것()에 감추고 잘 감추었다고 희희낙락할 수 있으나, 밤이 되면 누군가 훔쳐갈 수 있으니, 그 이유는 큰 것 속에 작은 것이 들어가고 남는 자리가 있기 때문이다. 만일 천하를 천하에 감춘다면 도적은 말할 것 없고 도둑맞은 물건도 있을 수 없다. 훔쳐다가 감추어 둘 빈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세상천지가 어느 구석 하나 하느님의 품이 아닌 곳이 없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이 자기 물건을 훔쳐 자기 창고에 감추어 두었다는 말이 성립되지 않는 것과 같다. 더군다나 우주 삼라만상을 지으신 분은 그 우주 삼라만상보다 크신 분인데 감히 그분의 손에서 그분의 것을 훔치거나 빼앗을 수 있는 이는 없다.

아들과 아버지는 서로 상대를 자신 속에 감춘 하나다. 둘이면서 둘이 아니고 하나이며, 하나이며 또 서로 다른 둘이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는 선언은 하느님의 신성과 예수님의 신성이 하나라는 뜻이다. 단순히 인격적 의지적 차원의 일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날마다 기도한다. “주님, 당신과 하나 되어 오늘을 살게 하소서.”

우리가 하느님과 그리고 예수님과 인격적 의지적 하나됨을 이루는 것은 당연히 가능하다. 아니 우리 영성 생활의 최종 종착점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아파하고, 예수님의 눈이 되어 판단하고 선택하며, 예수님의 팔과 다리가 되어 땀 흘리는 영성이 바로 그것이다. 연민으로, 올바른 판단과 선택으로, 사랑의 실천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 우리 신앙생활의 본질이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처럼 살아야 한다.

 

네팔의 형제자매들이 울고 있다. 이 세상 어느 민족도 하느님의 피조물 아닌 족속 없다. 가난한 삶이지만 소박한 기쁨과 단순한 행복에 감사하며 살던 그들이 오늘 이 시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처럼 희생양이 되어 우리 앞에 다가왔다. 세상의 모든 죄악들이 가공할 지진이 되어 세상에서 가장 약하고 가난한 이들이 사는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마저 뒤흔들게 된 상징적 표징은 아닐까? 오직 끝없는 성장과 발전, 물질과 쾌락만을 추구하는 현세의 인류를 향해 던지는 하느님의 마지막 경고가 아니길 바랄 뿐이다.

 

하느님의 자녀인 형제들이 죽었고, 죽어가고 있고, 아파하며 울고 있다. 예수님이 계시다면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할까? 예수님과 하나이기를 원하고 바라는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느님의 것인 우주를 결코 그 어디에도 숨길 수 없음을 아는 우리는 네팔의 슬픔과 불행을 슬그머니 망각의 구덩이로 집어넣고 아무 일 없는 듯이 살 수 없고 또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 팔짱끼고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해서는 안 되리라. 만일 그런다면 다음에는 네 차례가 될 것이라는 경고의 음성이 귓전에 맴돈다.

 

고통 중에 있는 네팔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고통당하시고 아파하시는 당신을 봅니다. 주님! 저희들도 당신과 함께 형제자매들의 아픔과 고난이 저희의 것임을 느낄 수 있는 예민한 감수성을 주시고, 형제자매들을 위해 구체적인 사랑과 나눔을 행할 용기를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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