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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엽동성당

말씀과 함께, 공동체와 더불어

사제의글

2015-04-18 21:56

부활 3주일

2,320
김오석 라이문도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루가 24,37)

 

제자들 가운데 홀연히 나타난 예수님은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는 첫 말씀으로 죄의식으로 고뇌하는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지신다. 그러나 제자들은 오히려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한다. 왜 그랬을까?

어쩌면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죽은 사람이 앞에 나타나면 기겁하여 뒤로 자빠지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더군다나 체포당하여 끌려가 고통 받는 스승을 팽개치고 꽁무니를 뺏던 죄책감과, 스승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전전긍긍하던 제자들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다면 그들의 놀람과 두려움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근심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실에 대한 두려움과 미래에 대한 불안 없이 오늘을 기쁘게 살아갈 있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듯하다. 꾸준히 수련하여 오늘에 집중하되 매사에 감사하고 내일을 향한 희망으로 허리를 묶고, 웃음과 기쁨을 스스로 뿜어낼 수 있는 내공을 갖추도록 애쓸 일이다.

 

사실 대부분 사람들의 불안과 두려움의 뿌리에는 잃어버림, 즉 상실에 대한 공포가 자리하고 있다. 재물, 사람, 신망, 존경, 인정, 건강을 잃게 될지 모른다는 걱정, 그리고 종국에 절대적 상실로서 죽음에 대한 공포가 삶의 근원적 불안과 두려움의 요소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 각자가 하고 있는 현재의 근심과 걱정거리를 눈을 부릅뜨고 들여다보면 그 실체가 매우 허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조사에 의하면 사람들이 하는 걱정거리의 대부분은 쓸데없는 것이라 한다. 40%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요, 30%는 이미 일어났던 일이 또 일어날까봐 하는 걱정이고, 22%는 너무 사소해서 무시해도 되는 것들이고, 4%는 우리가 바꿀 수 없는 일들이며, 4%만이 진짜 우리가 염려해야 하는 것들이라 한다. 어떤 근거로 이렇게 분류했는지 그 과정을 알 수는 없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실제 내가 감당해야 할 걱정거리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짧은 이야기 하나.

애 늙은이라는 별명을 지니 굴뚝새가 한나절 내내 굴뚝에 앉아 사냥꾼의 총에 맞아 죽으면 어떡하나하며 시름에 젖어 있었다. 그 때 굴뚝 주위를 날던 어미 참새가 굴뚝새의 이야기를 들은 후 아기 참새에게 말했다. “아가! 걱정은 결코 위험을 제거한 적이 없단다. 걱정은 결코 먹이를 그냥 가져다 준적이 없으며 눈물을 그치게 한 적도 없지.” “엄마, 그럼 걱정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요?” “네 날개, 네 발로 풀어야지. 그러면 저 굴뚝새 마냥 한나절 내내 걱정할 틈이 어디 있겠느냐?” 어미 참새가 창공으로 더 높이 날며 말했다. “걱정은 결코 두려움을 없애 준적이 없어. 날고 있는 새는 걱정할 여가가 없지!”

이 때 아래에서 하고 총소리가 들렸고 동시에 굴뚝새가 하고 땅으로 떨어졌다.

 

산에 걸려 넘어졌다는 사람을 본적이 있는가? 우리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은 작은 돌부리이다. 작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것이 두려워 주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사실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은 단 한 가지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분의 증인이 되지 못함에 대한 걱정 혹은 그분의 사랑에 온전히 응답하지 못하고 내 앞의 사소한 이기적 욕심에 매달려 하늘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걱정 정도면 인생의 걱정거리로 충분하지 않을까?

 

매일 매순간 죽기를 자처함으로써 더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부활의 삶, 비우고 버리기를 마다하지 않음으로써 얻게 되는 빈 무덤의 텅 빈 충만으로 존재를 누리는 그런 삶. 누군가 그런 경지에 이르러 살아갈 수 있다면 그는 이미 영원에 맞닿아 있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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