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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엽동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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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의글

2015-04-11 01:50

부활 팔일 축제 내 토요일

2,792
김오석 라이문도

그들은 예수님께서 살아계시며 그 여자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마르 16,11)

그들이 돌아가 다른 제자들에게 알렸지만 제자들은 그들의 말도 믿지 않았다.”(마르 16,13)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 이 말 당신은 믿을 수 있는가?

더군다나 십자가 위에서 온갖 고통 다 겪고 단장의 비명 끝에 절명하신 분, 군사가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 죽음을 확인했던 그 분이 살아있다는 말, 그분과 함께 길을 걸었고 대화를 나누었고 같은 식탁에서 빵을 나누었다는 말을 당신은 믿을 수 있겠는가? 믿을 수 없을 것이다. 아니 믿지 않는 것이 정상적인 선택이고 상식에 가까울 것이다. 죽은 사람은 살아날 수 없는 것이 자연의 법칙 아닌가? 제자들 역시 여자들의 호들갑스러운 증언이나 시골길을 가다가 예수님을 만났다는 다른 제자들의 말을 믿을 수 없었고 믿지 않았다.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다.

결국 예수님은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에 나타나셔서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고 오늘 복음은 전한다. 그런데 꾸짖은 이유인즉 되살아난 당신을 본 사람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믿음이란 결국 무엇인가? 보았고, 만졌고, 확실히 인식한 것에 대하여 사람들은 믿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나는 코끼리를 봤고 만지기도 했으며, 그래서 확실히 코끼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라고 말하지 코끼리가 존재함을 믿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믿음의 차이를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고 해야 한다.

 

믿음이란 100% 나의 체험 영역에 들어와 있지 않는 어떤 현상, 실재, 존재에 대해서 이러저러한 몇 가지 타당한 설명이나 근거에 따라 유추하고 사유한 결과 이러저러함을 믿는다라고 말할 때 쓰는 단어다. 때로는 신뢰할 수 있는 어떤 이의 증언을 따라 내가 신뢰하는 그 사람의 주장과 생각을 나도 따른다고 할 때 믿음이라는 말이 의미를 갖게 된다.

 

믿음은 그러므로 천 길 낭떠러지 길을 전후좌우를 분간할 수 없는 짙은 안개 속에서 앞서가는 이의 목소리와 발자국 소리만을 의지해 한발 한발 내딛는 발걸음과 같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앞선 이가 붙들어 준 손에 나의 모든 것을 맡기고 길을 걷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때로는 한 발만 더 내 딛으면 절벽에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허공에 발을 내딛는 무모한 용기를 요구받는 것이 믿음의 길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부활신앙이란 분명히 목격 증인으로부터 전해 받은 신앙이다. 신뢰할 만한 수많은 사람들, 특별히 사도들의 증언에 의해 전수된 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이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증언한다.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준 복음은 이렇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1코린 15,3-5) 사도로부터 전해진 믿음이 바로 부활 신앙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듯이 부활 신앙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체험을 통해 확신이 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려는 열망을 품고 갈릴래아로 달려가는 우리의 열정이 주님을 만나게 해줄 것이다. 고통받고 가난한 이웃들을 진심으로 내 마음 안에 자리 잡게 할 때,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게 될 것이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얻게 될 것이다.

백척간두에 서서 허공으로 한발을 더 내딛는 무모한 용기가 참된 믿음과 결합될 때 그는 날개를 얻어 하늘을 날게 될 것이다. 우리 모두 하늘을 나는 그 날까지~~~ Go Go!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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