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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엽동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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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의글

2015-04-06 01:05

부활 팔일 축제 내 월요일

1,624
김오석 라이문도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갔다.’하여라.”(마태 28,13)

    

부활신앙은 두 가지 기본 사실, 곧 빈 무덤과 살아계신 예수님을 목격한 사도들의 증언에 기초하고 있다. 부활의 현상을 직접 목격한 사람은 없으며, 다만 이미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을 뿐이다. 빈 무덤만으로는 부활의 확고부동한 증거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으며, 그런 해석 가운데서 하나가 "시신을 훔쳐갔다"는 해석이다

그러므로 부활 신앙의 기초를 이루는 것은 부활하신 그분이 당신 제자들 앞에 나타나신 발현사건들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을 오해한다. "부활은 이 세상에서도 복 받고 죽은 후 저 세상에서도 영생하고 복을 받는 것이다"라고.

하느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나라, 저 세상에 별도로 존재하는 그런 것이라는 관점은 부활신앙과 관계없다. 만약 그런 나라라면 더 더욱 우리가 염려할 바가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손안에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만약 천국이 본래 없는 것이라면 우리가 확신한다고 해서, 없는 천국이 갑자기 생기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확신한다고 해서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 구원받게 되는 것도 아니다. 내가 구원을 믿으니 하느님도 꼼짝없이 나를 구원하여야 한다면 얼마나 우리가 하느님을 우습게 만드는 일인가? 나의 생각에 하느님도 종속되어야만 하는가? 또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확신이 없다고 해서 하느님 보시기에 구원받을 만한 사람인데 멸망하는 것도 아니고 천국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저 세상'의 존재에 연연해 할 필요가 없다. 그런 태도야 말로 불신앙이다. 그것은 철저히 하느님의 주권 안에 있으며 하느님께서 은총의 선물로 마련하시는 것이다. 우리들이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은 따로 있다. 예수께서 몸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신 길을 그의 제자가 되어 따라야 한다. 주님께서는 저 세상을 미리 들여다 본 것처럼 확신하며 이 땅에서는 아무 열매도 맺으려 하지 않는 잎만 무성한 가지들을 잘라 버리실 것이다. 하느님께서 판단하실 일을 왜 우리가 미리 훔쳐보길 원하고 노심초사 하는가? 우리들 각자가 구원받을 수 있을까 아닐까를 제 운명을 점쳐서 알고 싶듯이 미리 보려고 할 필요가 없다. 구원받을 사람을 구별하고 판단하는 일은 하느님께서 하실 일이지 우리들이 할 일이 아니다.


단지 예수께서는 "나를 따라 오라.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한다. 구원은 예수님을 따라 사는 사람에게 주시는 은총이다. 이 세상에서 아무런 열매도 맺지 않고 단지 "알렐루야! 주님께서 나를 구원하셨다."고 하는 착각 속에서 살아온 사람에게, 그 착각에 근거해서 구원을 주시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 나라는 인류의 평등과 평화를 위해 이웃 사랑을 위해 몸 바치는 사람들에게 열려져 있고 이미 그들은 그 나라를 맛보고 있다.

    

바오로 사도가 "날마다 죽으면서 산다."고 고백한 것은 죽음과 부활이 우리의 현실 가운데 있다는 것을 역설한다. 부활은 나를 버리고 하느님만을 신뢰하며 하느님의 미래를 나의 현실로 당겨 사는 것이다.

    

"그가 우리를 대신해서 죽었다면, 우리는 그를 대신해서 살아야 할 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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