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엽동성당

말씀과 함께, 공동체와 더불어

사제의글

2015-04-04 05:00

부활성야

1,164
김오석 라이문도

금요일 오후 3시 십자가의 길을 마치고 돌아가는 교우분들과 인사를 하는데 대부분 얼굴이 밝다. “아니, 예수님이 돌아가셨는데 기분이 좋으세요?” 짓궂게 질문하는데도 모두 미소지으며 하는 대답이 내일 부활하시잖아요!” ... <아니 뭐시라고라?>

정해진 순서대로 진행되는 전례가 매년 반복되다 보니 이제 이골이 나기도 하겠다. 당연하게 해피엔딩의 결과를 아는 오늘의 고난과 불행은 설혹 그것이 죽음일지라도 웃을 수 있는 것이다. 다만 현재를 사는 우리가 직면하는 고통은 전부가 그 끝을 알 수 없기에 눈물은 마르지 않고 시름도 계속되며 못 박힌 손과 발의 통증은 점점 심해지고 자꾸 아래로 처지는 몸의 무게에 눌린 폐의 기능 저하 때문에 호흡도 곤란해지는 것이다.

오늘 끝을 모르는 고통 속에 매 순간을 버티고 견디어내며 마른 눈물을 삼키는 이들이 누구인가 둘러볼 수 있어야 한다.

 

지난 321() 73명의 본당 형제자매들과 함께 진도 팽목항에 다녀 왔다. 사실 너무나 부끄럽게도 세월호에 대해 틈만 나면 떠들었지만 사실 난 앵무새였을 뿐임을 고백한다. 가만 생각해보면 모두 다 살릴 수 있었던 우리의 아이들, 형제자매들이었지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가만있으라는 지시를 거역하고 밖으로 나온 사람들 외엔 한 사람도 구해내지 못한 구조 책임 당사자들과 국가에 대해 비판과 분노를 터뜨렸을 뿐 정작 나 자신은 고통받는 이들 곁에 함께 서서 비를 맞아 주지 못했고, 마음으로 그들의 아픔을 깊이 있게 공감하지 못했다.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심을 다해 아파하지 않았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노란 리본 달고 다니는 것조차 어색하게 느껴 어정쩡한 태도를 취했었다.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어떤 식으로든 빨리 정리 마무리되길 원하고 기다렸는지 모른다.

 

십자가에 매달려 오늘 죽음을 맞으신 예수님, 타인의 고통 앞에 무감하고 위선으로 가득 찬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당신의 죽음이 바로 저 때문임을 이제야 알겠나이다.”

 

작년 416일은 성주간 수요일이었다. 이제 416일이면 1주년이 되는데 세월호는 아직도 물속에 잠겨 있고 사건은 여전히 진행형이며 철저한 진상규명과 안전대책은 오리무중이다. 이제 경제를 위해 세월호 이야기는 그만하자고, 이제 지쳤다고 세월호 사고가 다른 사고와 다를 게 뭐 있느냐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딴지걸기도 계속되고 있고 ... 1년이 지났건만 변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저 2014416! 그 날 그대로 머물러 있는 우리 사회와 국가와 우리 모두의 현실에 대해 내 탓이요!’라고 가슴 치며 하늘에 있는 아이들에게 미안함과 용서를 청하면 그만일까? 생때같은 아이들을 차가운 물속에 수장시키고 힘들어 하는 유가족들의 고통과 상처는 어떻게 어루만지고 치유해야 하는 걸까?

 

세월호의 희생자들이 우리나라의 미래를 밝히는 횃불로 부활하지 않고서는, 그들의 죽음을 야기한 이 땅의 기득권자들의 물신주의와 보신주의, 적당주의와 부패의 고리를 무덤에 묻어버리지 않고서, 우리가 그저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만 예수 부활하셨네!”라고 노래하는 것은 부활절을 맞을 때 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옆구리가 창에 찔리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어제 십자가의 길 13처에서 했던 묵상을 떠올려 본다. “그래도 산자는 죽은 자를 위해 해야 할 일이 있는 것, 사랑하는 님의 주검을 내 손으로 거둔다. 산 사람은 울면서도 밥을 먹어야 한다. 아이들도 챙겨야 한다. 내일도 해는 다시 솟아오르기 때문이다.”(십자가의 길, 박기호 신부 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이야기하고 묵상하고 기뻐해야 한다. 왜냐하면 기쁨이란 세상에 슬플 일이 없어지거나 완벽한 세상이 될 때만 찾아오는 정지된 실재가 아니라, 우리가 삶의 슬픔과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의 생명을 만날 때 피어나는 꽃과 같은 것이기에 그렇다. 예수님의 부활은 어둠과 절망의 한 복판에서도 엎드려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야할 우리 믿음의 시작이요 빛이요, 마침이기에 결국 그분의 부활을 통해 이 어둠이 이 슬픔이 이 고통이 끝장나리라는 희망으로 기쁨의 씨앗을 잉태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내일은 내일의 해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반대자들에 의해 사형 선고를 받으셨고 자신들의 기득권의 침해를 걱정한 지배자들의 음모와 협잡과 우매한 군중들의 광기로 십자가를 짊어졌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고 묻히셨지만, 그 모든 어둠을 뚫고 그분을 따르던 사람들에 의해 백송이 만송이 백만 송이의 꽃으로 피어나 고통 가운데 아파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희망이 되고 있기에 그렇다.

 

그래서 어렵지만 마음을 모아 교우 여러분에게 다시 인사를 드립니다. 죽음의 어둠, 적막 같은 긴 밤이 지나갔습니다. 아니 그렇게 지나 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예수님 부활의 기쁨과 축복이 교우 여러분의 가정에 그리고 온 세상에 충만하길 기원합니다. 알렐루야!

 

부활이란 죽어야만 산다는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치는 말입니다. 참된 죽음이 참된 생명을 일궈낸다는 진리를 가르치는 하느님의 언어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 없는 부활의 삶은 없습니다. 먼저 죽지 않고서는 부활도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천사는 무덤을 찾은 여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가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일러라. 예수님께서는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를 거기에서 뵙게 될 것이다.”(마르 16.7)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들이라면 우리 역시 이 시대의 갈릴래아로 가야 합니다. 그래야 그곳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갈릴래아는 이방인의 피가 섞인 땅이요, 그래서 천대받는 가난한 이들의 땅이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사람들을 만나고 치유하고 설교하고 가르쳤던 곳입니다. 설움과 핍박, 가난과 비루함, 두려움과 수치가 뒤엉켜 있는 곳, 그러나 사람들의 땀과 눈물, 기쁨과 슬픔, 희망과 사랑이 함께 하는 곳입니다.

내 삶의 주변에서 내게 가장 가까운 갈릴래아의 땅은 어딘지 성찰하고 고민하는 부활성야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사는 형제자매들을 만나러 갈 때 우리는 그들 안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자식들의 사진과 이름을 가슴에 달고 아파하는 세월호 희생자들의 부모들이 자식의 목숨 값으로 더 많은 돈을 얻기 위해 떼를 쓰는 비윤리적인 사람들이 아니라는 확신이 든다면 그 분들이 바라는 소망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고 힘을 모아 행동하는 것이 우리가 가야 할 이 시대의 갈릴래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고통과 어둠 속에서 힘들어 하는 모든 이들에게 작은 힘이 될 수 있도록 우리 믿는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아름다운 부활의 꽃이 되기를 기도하는 오늘 밤이 되었으면 합니다.

교우 여러분의 가정에도 예수님 부활의 밝은 빛이 충만하시길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