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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엽동성당

말씀과 함께, 공동체와 더불어

사제의글

2015-04-03 01:54

성주간 목요일

2,367
김오석 라이문도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거행하셨던 최후의 만찬을 기념합니다. 당신 사랑의 성체 성사를 제정하신 것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죽음이 목전에 다가온 상황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그들과 함께 마지막 식사를 하십니다.

 

우리는 매일 거행하는 미사를 통해 바로 이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을 기억하고 그 정신을 되새깁니다. 이런 관점에서 교회가 거행하는 성찬례는 그리스도의 마지막 만찬을 그저 매일 단순 반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찬례를 통해 우리는 세상의 박해와 죽음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길, 사랑의 길을 선택하신 예수님의 몸 바침을 뒤따르겠다는 비장한 결의를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너희는 이 잔을 마실 때 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코린1 11,24-25) 우리는 예수님의 이 명령에 따라 성찬례를 거행하며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기억하고 기념하며 아울러 하느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참된 예배란 과연 어떤 것입니까? 엄숙한 표정으로 미사에 참석하여 주님, 주님하고 부르는 것으로 우리의 예배와 흠숭을 마무리해도 좋은 것입니까?

너희가 바친 번제물과 곡식 제물이 나는 조금도 달갑지 않다. 친교 제물로 바치는 살진 제물은 보기도 싫다. 거들떠보기도 싫다, 그 시끄러운 노랫소리를 집어치워라. 거문고 가락도 귀찮다.”(아모 5,22-23)고 아모스 예언자는 야훼 하느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무엇이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제사입니까? “다만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서로 위하는 마음 개울같이 넘쳐흐르게 하여라.”(아모스 5,24) "억울하게 묶인 이를 끌러주고 멍에를 풀어주는 것, 압제 받는 이들을 석방하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버리는 것이다. 네가 먹을 것을 굶주린 이에게 나눠 주는 것, 떠돌며 고생하는 사람을 제 집에 맞아들이고 헐벗은 사람을 입혀주며 제 골육을 모른 체 하지 않는 것(이사 58,6-7)"이라고 이사야 예언자는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예언자들의 전통과 똑같은 맥락 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동물을 잡아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마태 12,7)"이라고 말입니다. 경건한 신심수행도 좋고 십일조를 바치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 먼저 훨씬 중요한 것은 정의와 자비와 성실(마태 23,23)입니다.

 

예언자들과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예배가 그 진실성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흠숭과 제사는 정직하고 올바른 삶의 표현이어야 합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가 예수님의 삶과 십자가가 드러내는 진정한 사랑과 나눔, 투신의 실천행위 없이, 불의와 압제, 미움과 증오를 덮어버리고 감추는 겉치레에 머물게 되면 그것은 우상숭배에 불과하며, 오히려 정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역겨워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모독이 될 수도 있음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러기에 최후의 만찬을 기념하고 재현하는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철저한 봉사와 형제애를 강조하며, 서로가 서로의 발을 씻어줄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신 후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차례로 씻으신 다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준 것이다"(요한 13,14)

 

최후의 만찬을 기념하는 오늘의 복음이 직접적으로 만찬을 제정한 복음을 선택하지 않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장면을 선택한 것은 바로 성찬례가 지니는 근본정신이 어디에 있는가를 명확히 제시하고자 하는 교회의 관점이라고 하겠습니다. 발을 씻어주는 행위는 이스라엘에 있어서 종의 몫이었습니다. 가장 낮은 자의 모습을 스스로 취하고 형제들의 발을 씻어주는 이 모습은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우리들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근본적이면서도 최종적인 당신 육화의 비밀인 것입니다. 하느님이신 분이 사람이 되신 것으로 부족하여, 사람 중에서도 가장 낮은 자, 종의 모습으로 사람을 섬기셨으니 그분을 스승, 주님으로 부르는 우리의 삶은 더 이상 구구한 설명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 삶 속에서 우리는 섬기는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지배하고자 하는 강한 욕구를 억누르지 못하고 사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다른 사람의 사소한 잘못에도 쉽게 화를 내고 미움을 키웁니다. 무시당했다는 느낌을 받으면 참지 못하고 분노를 터뜨리고, 자신이 잘못하고서도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라는 말 한마디 하는 것조차 너무 어려워하는 우리들입니다.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미움과 증오의 뿌리를 잘라내지 않고는, 우리 안에 웅크리고 있는 지배욕, 명예욕, 알량한 자존심을 버리지 않고서는, 우리는 참으로 진실 되게 성찬례를 거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할 때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그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고 하셨습니다. 성찬례는 분명히 화해를 통한 공동체의 하나 됨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성찬례는 정의를 추구하고 사랑의 삶을 실천하며, 종의 자세로 형제들을 섬기는 사람에게 그 진실한 의미가 밝히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목숨을 내어놓아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성찬례를 제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목숨을 우리에게 선물로 내놓으셨고 우리는 아무런 대가의 지불도 없이 그 생명의 은총을 누리는 행운을 간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영성체로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와 똑같은 일을 해야 합니다. 즉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선물이 되어야 합니다. 먹히는 밥이 되어야 합니다. 발을 씻어주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 섬김의 자세 없이 우리는 진정으로 성찬례에 참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잠시 후에 예수님께서 하셨던 것처럼 발을 씻는 예식을 거행하게 됩니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이 예식을 통해 우리 마음 안에 담긴 미움을 버리고, 겸손과 사랑의 마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곧고 올바른 삶을 살게 해 달라고 기도드립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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