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엽동성당

말씀과 함께, 공동체와 더불어

사제의글

2015-04-01 03:39

성주간 수요일

2,432
김오석 라이문도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25)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유다의 대답이다. “저는 아니겠지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예수님을 넘겨주기로 대사제와 모의한 유다도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반문하는 현실을... 나는 유다의 이 반문이 가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유다는 자신이 예수님을 배반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할 일을 다 하고 있다는 확신 속에 있었기에 나온 응답이었다고 생각한다.

자기 확신, 흔들릴 수 없다고 주장하는 고정관념의 용도폐기가 요구되는 상황이다. 나의 말과 행위가 옳다고 주장할 때, 그 주장이 나의 이기적 욕망과 얼마나 거리를 두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하느님의 백성, 교회의 분열을 초래하는 행위를 하면서도 자신이 하느님의 일을 하고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세속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예수님을 이용하는 사람이요,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의 행위와 다를 바 없다.

    

봉사와 나눔이 자신의 세상에서의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이 될 때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것임을 잊지 말라. 그러고 나서도 자신의 내면을 들어다 보지 못하면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강변한다. 정신이상자와 특별히 다르지 않다.

    

결국 유다는 자살을 선택했다. 자기선택의 절대성을 고집했던 그는 자신의 선택이 오류였음을 확인하는 순간 더 이상 생에 의욕을 상실했던 것이 아닐까?

    

사람들이 극한 상황에서 생존할 수 있는 원동력은 미래에 대한 비전, 희망이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다. 나치 독일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 빅터 트랭클의 진단이다. 사람을 살아남게 하는 것, 사람을 죽지 않고 버티게 하는 힘의 원천은 건강, 가족, 지능 등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희망이라는 것이다.

    

유다는 이것이 없었다. 비전, 희망, 사랑에 대한 그리움이 없었다.

    

어제의 묵상에서 바야흐로 배신의 시기라는 언급에 대해 많은 교우들이 불편해 하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인간이란 그런 존재임을 부인하지 말자는 의미였다. 아무리 준비되고 무장된 그리스도인도 무너지는 것은 순간이라는 의미다.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시련 때문에 배신자가 되지는 말아야 하겠다.

배신한 유다는 결국 자살하고 말았다. 희망의 빛을 놓쳐버렸기에.

    

희망은 아무것이나 붙들고 희망이라고 우겨야 한다고 주장하던 어떤 신부님의 말씀이 기억나는 오늘이다.

희망은 신앙인들이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살아있는 실재가 되어야 한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