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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엽동성당

말씀과 함께, 공동체와 더불어

사제의글

2016-02-03 21:44

연중 4주 목요일

1,795
김오석 라이문도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 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마르 6,8-9)

 


예수님은 당신의 부르심에 응답한 제자들을 가르친 다음 그들을 복음화의 일꾼으로 사람들 가운데 파견하신다. 길을 떠나는 제자들의 지녀야 할 여장에 대한 지침이 오늘 복음의 핵심이다. 지팡이와 신발 한 켤레, 그리고 옷 한 벌이 전부다. 시대의 격차가 있긴 하지만 하느님 나라 선포의 소명을 받고 떠나는 제자들의 행장을 오늘의 시선으로 평가한다면 참 소박하다 못해 초라하기까지 하다.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고 지팡이와 신발 한 켤레 그리고 옷 한 벌이라는 제한은 자못 비장한 느낌마저 든다. 복음 선포와 하느님 나라를 이루는 일은 세상의 것으로부터 그 힘과 능력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단호함이 담겨 있다. 오직 스승이신 예수님께 모든 것을 의탁할 때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예수님을 드러낸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싶다. 오늘날 복음 선포자로 파견 받은 자의 삶도 이 원칙에 벗어나서는 곤란하다는 지침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당신의 사도적 권고 <복음의 기쁨>에서 영적세속성의 폐해에 대해 경고하신다. 영적 세속성이란 신앙심의 외양 뒤에, 심지어 교회에 대한 사랑의 겉모습 뒤에 숨어서 주님의 영광이 아니라 인간적인 영광과 개인의 안녕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지적하신다.

 


복음 선포와 하느님나라 건설의 여정에 뛰어든 일꾼들이 자기 개인의 안녕과 이득을 신앙의 이름으로 취하는 것은 커다란 유혹이며 실질적으로 하느님과 교회를 욕되게 하는 검은 그림자가 될 뿐이다. 교회와 교회의 일꾼들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사명을 지속하며 가난한 이들을 위한 투신을 계속해야 한다.

 


파견되는 제자들의 소박한 행장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복음 선포자로 살아가는 내 자신의 소유물와 영적세속성을 성찰하지 않을 수 없다. 홀로 살아가는 내 삶의 터전에 너무도 많은 욕망의 파편들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음을 목도하기 때문이다.

 


한 벌의 옷이 아니라 철 따라 입을 수 있는 옷들이 옷걸이에 가득하다. 다 읽지도 못한 책들이 벽을 따라 빙 둘러 있는 책꽂이에 가득한 것도 부족하여 책상 여기 저기 널려 있다. 자동차와 레저용 자전거, 컴퓨터와 노트북, TV와 오디오, 냉장고와 운동기구 등이 모두 욕심의 흔적으로 드러난다. 예수님을 핑계 삼아 나도 모르는 사이 개인적 즐거움과 편안함에만 집착한 영적세속성의 결과물인 듯하여 마음이 불편하다.

 


온전히 예수님 그분에게만 의지하고 살지 못했음을 반성한다. 인간적 존경과 교우들의 평가에 연연하며 가식적 행위를 일삼아 왔음을 고백한다. 이제 행장을 좀 줄여야 할 때다. 있는 그대로 나를 드러내며 오직 복음에만 헌신할 결의를 새삼 다독여야 할 때다.

주님, 부족한 제가 그래도 당신의 옷자락을 붙들고 저의 욕망의 흔적들을 정리할 있도록 용기와 지혜를 허락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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