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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엽동성당

말씀과 함께, 공동체와 더불어

사제의글

2016-02-01 01:10

연중 4주 월요일

1,787
김오석 라이문도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시자마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무덤에서 나와 그분께 마주 왔다. 그는 무덤에서 살았는데, 이미 여러 번 족쇄와 쇠사슬로 묶어 두었으나, 그는 쇠사들도 끊고 족쇄도 부수어 버려 아무도 그를 휘어잡을 수가 없었다. 그는 밤낮으로 무덤과 산에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치곤 하였다.”(마르 5,1-5)

 


무덤에서 사는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

어떤 처지인지 상상해 보라. 그 누구도 통제할 수 없고 제멋대로의 광폭한 행동을 일상으로 하는 사람이다. 그는 무덤에서 살 수 밖에 없다. 땅 속에서는 살이 썩어가고 사람들은 짐짓 가까이 다가가려 하지 않는 무덤이 일상을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 되어 버린 사람의 꼬락서니는 얼마나 처량하고 비참하고 안쓰러운 일인가?

 


시선을 자신에게 돌려보면 별로 차이가 없음을 깨닫게 되고 흠칫 놀랄 수밖에 없다. 오른쪽으로 가려고 했는데 결과는 왼쪽이요, 선한 일을 하려 했으나 행동은 습관적으로 못된 짓을 하고 있고, 사랑을 베풀려고 했으나 자기 이득과 체면에 연연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상황은 가슴 서늘한 우리들의 한계다. 어둠의 구렁텅이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자신의 습관적이고 반복적인 죄스러움을 똑바로 바라보게 되면 우리 역시 가슴을 치며 후회하기도 하고 좌절의 심연에 빠지기도 한다.

 


마치 오늘 복음에서 더러운 악령 들린 사람이 무덤에 살면서, 발에는 쇠고랑을 채우고 쇠사슬로 온 몸을 묶어 놓아도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무덤 사이와 산등성을 날뛰면서 돌로 자신을 치는 모습이야말로 어쩌면 평생을 그리 살아가는 연약한 우리들의 죄스런 처지를 대변해 주고 있다는 느낌은 나만의 과장된 생각일까?

 


예수님께서 악령 들린 사람을 온전하게 해주시는 장면에서 군대라고 불리는 악령을 이천 마리쯤 되는 돼지 떼에게 옮겨가도록 허락하신다. 우리의 삶 가운데 그리고 우리의 마음속에 달라붙어 떨어지려 하지 않는 수많은 죄악의 뿌리가 그토록 많은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하고 싶다.

 


거대한 황금의 바벨탑을 쌓으려 발버둥치고, 향락과 퇴폐에 길들여져 자신도 모르게 죽음의 문화를 탐닉하며 찰나에 매달려 내일 없는 삶을 살고 있는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에서, 떼 마귀 들려 브레이크 없는 욕망의 기관차에 탑승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자 복이 있다. 가슴 치며 돌아서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겠다.

 



자신의 현재 위치를 발견하는 자, 가슴 치며 돌아설 마음이 있는 자 희망이 있다. “군대라는 마귀 들렸던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으로 앉아 있는 것”(마르 5,15)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출발은 무덤에서 나오는 일’(마르 5,2)에서 시작된다. 자의든 타의든 현재 자신을 감싸고 있는 숨 막히는 죄스런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의지에서 변화는 시작된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을 만나 그분께 온전히 맡겨드리는 의탁이 필요하다.

 

화려하고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이 손짓하는 욕망과 탐욕의 문화는 내 몸과 다름없는 자연을 망가뜨리고 또 온 인류를 절멸시킬 수 있는 가공할 살상 무기들을 쌓아두고 모두를 죽음에로 이끄는 마귀 떼들의 잔치판일 뿐이다. 정치가, , 과학에는 이를 이겨낼 힘이 없다. 선택은 단 하나 뿐이다. 마귀 떼 스스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라 실토했던 그분, 예수님께 날아드는 한여름 밤의 나방이 되지 않고서는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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