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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엽동성당

말씀과 함께, 공동체와 더불어

사제의글

2016-01-29 23:38

연중 3주 토요일

1,908
김오석 라이문도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차게 되었다.”(마르 4,37)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하고 말씀하셨다.”(마르 4,40)

 


믿음의 진정성은 환난이나 위기, 절망의 깊은 구렁에서 밝히 드러나는 법이다. 평온한 상태에서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고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일이란 실상 잘 훈련된 신심 깊은 사람에겐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정작 위기의 상황이 닥치면 그 모든 것이 바람에 흩날리는 검불처럼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갑작스런 사업의 실패로 하루 아침에 생존의 위협을 느낄 때, 사랑하는 부모나 자녀, 애인, 가족의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해야 할 때, 건강하던 아이가 불치의 병 진단으로 하늘이 무너지는 절망을 겪을 때 과연 우리의 믿음이 흔들림 없이 그대로 유지될 수 있을까? 왜 하필 나에게 이런 고통이! 나는 성실하게 주님을 믿었고 선행에 힘써왔는데...라며 한탄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길가, 돌밭,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앗의 믿음으로는 이런 위기의 상황에서 믿음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수련과 수양이 필요한 이유다. 시공간에 펼쳐지는 나와 관련되는 모든 일이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것임을 받아들이는 수용의 영성이 요청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것이 행복이든 불행이든 그 안에 담겨 있는 하느님의 뜻을 읽고 받아들일 수 있는 열려있되 초연한 자세가 참된 완덕의 경지라 하겠다. 거의 불가능한 주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영성 생활의 목표는 바로 그런 경지여야 한다.

 


돌풍이 불고 배에 물이 들이쳐서 좌초의 위험에 처하게 된 상태가 오늘 제자들의 상황이었다. 뱃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평온하게 잠들어 계신 예수님을 향해 내던진 제자들의 탄원이 이렇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마르 4,38)

 


삶의 위기와 절망적 상황에서 주님! 어디 계시나요. 저의 이 가련한 처지가 보이지 않으시나요?”라고 부르짖는 우리들의 탄식과 닮았다. 잠들어 계시는 하느님, 응답 없는 하느님을 체험해 본 사람은 그 답답함과 절망을 잘 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가까이에 계신다. 배가 침몰하면 가장 먼저 물속에 잠길 고물에서 주무시고 계신다. 우리와 함께 운명을 같이할 준비가 되어 있으시다!

 


믿는다는 말은 라틴어로 크레데레(credere)’이다. 이 말은 ‘cor’(마음, 심장)‘dare’(주다, 넘겨주다)의 합성어다. 그러므로 믿는다는 것은 내가 믿는 대상에게 내 마음(심장)을 넘겨주는 것이다.' 나의 전부를 넘겨주는 것이다. 내가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께 나의 모든 것을 넘겨드리는 것이다. 나에게 남는 것 하나 없이 넘겨주는 것이다. 넘겨주지 못한다는 것은 믿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요구하는 믿음이란 바로 이런 믿음이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나에게 아무 것도 남지 않고, 내 존재마저 텅 비워 하느님께 내어놓을 때 삶도 죽음도, 성공도 실패도, 부귀와 가난도 날 어쩌지 못한다는 것이다. 돌풍도 거센 파도도 배 안에 가득 찬 물도 나의 텅 빈 평온함을 어쩌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질의 세계에서 물질적 존재로 살아가는 우리가 그런 텅 빈 평온함을 추구하는 것이 가당치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아무도 모른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시지 않으신다는 믿음을 간직하자.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예수님의 말씀, 마음에 새기며 오늘을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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