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엽동성당

말씀과 함께, 공동체와 더불어

사제의글

2015-08-18 02:05

연중 20주 화요일

2,133
김오석 라이문도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 19,24)

 

부자와 하느님 나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 많은 돈과 재물을 예금통장과 곳간에 쌓아둔 사람이 하느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왜 그럴까? 하느님이 창조하신 세상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다. 하느님이 주인이시다. 태초에 지구는 소유권을 단위로 땅에 금이 그어져 있지 않았다. 하느님은 숨 쉬고 살아있는 모든 생명이 자연 속에서 자신의 본성적 욕구를 충족하며 조화롭게 자연을 공유하며 살아가도록 만드셨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세상 창조에 스며들게 한 코스모스(질서)의 본 의미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이, 탐욕이 분리선을 그었고 내 것과 네 것을 구별하였다. 그리고 소유가 주는 안락과 쾌락과 편리를 맛본 인간은 네 것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을 시작했고, 오늘날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을 선()으로 간주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만들어 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자본주의는 예수님께서 선포한 하느님 나라와는 본질에 있어서 거리가 아주 멀다. 오히려 대척점에 서있다. 오늘 복음의 이 구절은 아마 부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대목이 아닐까 생각된다. 가능하다면 신약성서에서 지워버리고 싶을 지도 모른다.

 

지구의 땅과 자원은 한정적이다. 무한하지 않다. 그러나 지구상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나누어 쓰는 데는 절대 부족하지 않다. 끝없는 인간의 소유욕이 약하고 힘없는 이들의 몫을 독점과 축적으로 탈취하는 일이 합법적으로 아무런 제재도 없이 행해지고 있다. 이것이 현실이다.

 

부자란 어떤 사람인가? 예금통장에 많은 돈이 숫자로 찍혀있는 사람이다. 개인의 금고에는 귀금속과 현금 등을 쌓아두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불편함을 모르는 사람이다. 배고픔이 뭔지 모르는 사람들이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욕구를 즉각적으로 해결할 수 있기에 기다릴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다. 죽음도 돈이 다 해결해 줄 수 있다고 착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저승사자가 턱 밑에 칼을 들이대기까지는.

 

부자가 재물이 주는 안온함과 쾌적함과 편리함에 익숙하게 되면 하느님이 필요치 않다. 하느님 없이도 인생이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돈이 지니고 있는 물신성은 현실에서 가장 위협적인 것을 부정하는 수단이 된다. 돈은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환상적 불멸을 제공한다. 하느님 없이 하느님을 믿는 신앙생활이 가능한가? 그것은 자기기만이고 착각일 뿐이다.

 

부자는 기본적으로 하느님 창조 원리를 거스르고 있기에 하느님 나라와 멀리 떨어져 있다. 부의 원천을 더듬어 올라가면 나의 것이라고 움켜쥐고 있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명석한 두뇌와 창조적인 아이디어, 건강한 몸으로 성실하게 노력하여 모은 재물이라 할지라도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신 분이 하느님이라는 고백을 한다면 나의 소유가 온전히 나에게 귀속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억지스럽다.

 

부자의 구원 가능성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태 19,26)

부자의 구원이 가능하려면 자신의 재물이 쌓여있는 곳간의 제일 아랫부분에 큼직한 구멍을 하나 뚫어두어야 한다. 그 구멍에서 흘러나오는 재물이 하늘의 창고에 쌓일 수 있도록 파이프라인을 설치해두어야 한다. 하늘의 창고란 다름 아닌 예수님께서 당신과 동일시했던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마태 25,40)이다. 파이프를 통해 흘러나가는 재물로 인해 부자가 가난해지는 것, 바로 그것이 구원의 길이다. 곳간이 비게 되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은총으로 그 곳간을 가득 채워 주실 것이다. 이것이 바늘귀를 깨트리는 방법이다. 깨트려진 바늘귀에 굳이 낙타를 밀어 넣을 이유가 없다.

 

나의 널따란 파이프라인은 견고할 뿐 아니라 잘 작동하고 있는가? 아직 설치되어 있지 않다면 서둘러야 할 일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