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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엽동성당

말씀과 함께, 공동체와 더불어

사제의글

2015-08-14 01:55

연중 19주 금(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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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오석 라이문도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태 19,5; 19,6)

 

반복할 수 없는 단 한 번의 연극 무대가 인생이라면, 그 중에서 결혼은 가장 중요한 선택이요 결단이다. 평생을 함께 할 반쪽을 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태초로부터 시작된 서로 잃어버린 반쪽이 길고 긴 세월, 우주 전체를 떠돌다가 제 짝을 찾은 것을 결혼이라 말하면, 오늘의 시대조류에 맞지 않는 고리타분한 생각일까? 급증하는 이혼율을 생각하면 그리 생각할 수도 있겠다. 사실 요즘은 누가 혼인미사 주례를 청해오면 덜컥 겁부터 난다. 주례를 하면서도 요놈들이 잘살아야 할 텐데...’하는 걱정이 앞서면서 기도가 저절로 우러나온다.

 

서로 사네, 못 사네하면서 갈라서는 이유의 대부분은 성격차이와 경제 문제라 한다. 2030년 이상을 서로 다른 환경과 교육으로 자란 두 사람이 성격이 다른 것은 너무난 당연하고 상식인데 그 차이와 다름 때문에 갈라서는 것은 사랑이 차갑게 식었기 때문이다. 미리 미리 두루 살펴보지 못한 자신의 불철저함을 반성할 일이지 갈라설 이유로는 합당하지 않다. 당연한 것을 문제 삼는 것은 꼬투리 잡기 밖에 되지 않는다.

경제 문제란 생활고요 돈 문제다.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오늘날 세상 가치관이 사랑이 아니라 돈으로, 결혼하는 남녀를 물화(物化)시켜 버렸다. 못 생겨도 돈이 많으면 사랑에 합당한 멋진 인간이요, 돈 없으면 잘 생긴 얼굴도 찌그러져 보이고 사람 좋은 것은 바보처럼 보인다. 신파극의 한 장면 같지만 여전히 사랑이냐, 돈이냐?’라는 질문에 잽싸게 돈을 향해 몸을 돌리는 오늘날 우리들의 속물적 자화상을 보는 것이 이제 부끄러운 일도 아닌 듯 덤덤하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결혼이란 남녀의 하나 됨이고 그것은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이기에 사람이 갈라놓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신다. 사실 정상적인 만남과 과정을 거쳐 결혼식을 하면서 금방 헤어질 것을 염두에 두는 사람은 없다. 행복한 미래를 꿈꾸며 웨딩마치를 울린다. 그러나 행복한 미래는 거저 오지 않는다. 사랑의 바다에 빠져 꿈을 꾸는 듯한 그런 사랑에서, 해변가로 나와 꿈에서 깬 정신이 든 그런 사랑으로 바라보는 내 배우자는 다르기 때문이다.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일은 생생한 현실이다. 서로 신비를 탐사하는 경건함과 존중,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사랑의 끈을 놓지 않으리라는 확고한 결단이 부부의 사랑을 풍요롭고 깊게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고로 사랑은 결단에 따른 지속적 행위로만 꽃피우고 열매 맺는다.

 

결혼은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이기에, 죽음이 그 둘을 갈라놓을 때까지는 그 인연을 끊을 수 없으며(혼인의 불가해소성), 결혼한 사람에게 동시에 배우자가 둘일 수 없으며(단일성), 부부는 평생을 함께 해야 할 운명공동체(운명공동체)라는 것이 교회의 기본 가르침이다.

 

오늘은 나의 배우자에 대한 첫 마음을 기억함으로써 세월과 현실의 무게에 덧씌워진 빛바랜 나의 사랑이 제 빛깔을 찾을 수 있도록 작은 이벤트를 준비해보면 좋겠다.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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