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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엽동성당

말씀과 함께, 공동체와 더불어

사제의글

2015-08-11 23:26

연중 19주 수요일

2,101
김오석 라이문도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형제에게 해야 하는 사랑의 충고에 대한 말씀이다. 공동체(가족, 친구, 동아리, 직장, 사회 특히 교회 공동체)에 속한 한 사람의 잘못은 그 개인에서 끝나지 않고 어떤 형식으로든 공동체 전체에 상처가 되고 영향을 미친다. 죄와 악행은 사회적 연대성을 지닌다. 이 사실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하고 그 원초적 뿌리에 해당하는 형제나 자매에게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공개적으로 형제의 죄에 대해 충고하는 것은 이웃 사랑의 표현이다. 나와 너가 남이 아니라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고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하나라는 의식,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공동 운명에 놓여있음을 드러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공동체의 잘못한 형제나 자매에게 사랑의 충고를 하는 것은 그리 만만치 않다. “너나 잘하셔!” 혹은 할일이 그리 없어요, 명퇴하셨나 봐요. 시간 많으시네요?”라는 빈정거림이나 힐난을 듣기 쉽기 때문이다. 그 결과 서로 마음 상해 서로 얼굴 마주하는 것도 거북하고 피하는,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 되어, 함께 자주 만나야 하는 공간에 살아가면서도 투명인간처럼 지내야 하는 경우도 많다.

 

형제적 사랑의 충고를 하는 사람은 당연히 감정적으로 흥분하여 하는 마음에 앞뒤 재지 않고 말을 꺼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충고는 그 바탕에 사랑이 깔려있어야 한다. 길을 벗어난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선 예수님의 안타까움과 연민을 마음에 품어야 한다. 진정성을 담아 무릎을 꿇은 심정으로 말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때는 공동체에 공론화하여도 무방하다. 그리고 함께 모여 꼭 해야 할 것이 잘못한 형제자매를 위한 공동 기도다. 그를 놓치지 않고 얻기 위하여 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늘 이것을 빼놓는 경향이 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마태 18,19) 이것이 오늘 복음의 권고다.

 

형제적 사랑의 충고를 받은 사람의 입장은 늘 기분 나쁘기 마련이다. 때로는 덧 씌워진 잘못된 이미지 때문에 나의 말과 행위가 침소봉대, 과잉 해석되어 되돌아오는 경우도 있고, 오해와 누명인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에도 자신에 대한 다른 이의 평가에 대해서는 겸허하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자신의 죄와 잘못에 대한 지적일 때는 말할 것도 없다. 탄로 나서 지적당하고 충고를 받아야 하는 처지가 화나고 짜증나고 부끄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골방에 들어가 욕망에 홀린 자신의 거짓 자아를 떨쳐내는 아픈 시간을 보내야 한다.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자신의 말과 생각과 행위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완전 해체하여 다시 꿰맞춰야 한다. 자신을 새롭게 성찰할 수 있음에 감사하면서... 이 시간이야 말로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 안에 머무는 시간이다. 구원의 때다.

 

우리는 모두 사랑의 충고를 하는 사람일 수도 받는 사람일 수도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인간의 나약함과 모자람이 서로가 서로를 이끌고 채워주도록, 홀로가 아니라 우리로서, 공동체로 하느님 앞에 나아가게 창조되었음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오늘 내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서 찾아낸 문제적 인간에게 사랑의 손 편지를 한통 쓸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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