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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엽동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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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의글

2015-08-11 04:00

연중 19주 화(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2,284
김오석 라이문도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 18,4)

 

예수님은 우리가 본받고 배워야 할 모범으로 어른이 아닌 어린이를 제시하신다. 당시 사회와 문화에서 어린이는 설 자리가 없었다. 어린이는 그저 보잘 것 없는 작은 이에 불과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어린이는 철저한 겸손의 모범이었다.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은 어린이와 같은 겸손함을 지녀야 한다.

 

겸손해지는 것은 비굴해지는 것과는 다르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사람은 비굴한 인간의 전형이다. 돈과 권력, 사회적 지위에 대한 욕망에서 나오는 속성이기 때문이다. 겸손해지려는 결심과 노력이 당연히 우리를 겸손한 사람으로 이끌지는 못한다. 오히려 내가 욕망과 자만심으로 가득 차있어 겸손과는 멀다는 자각이 필요하다. 겸손은 오히려 자기 자신에 대한 진실을 직시할 때 가능해지는 덕목이다. 실제의 내가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거나 열등하다고 상상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 비교나 경쟁 없이 자기 자신에 대한 진실을 우선적으로 직시해야 한다.

 

예수님이 겸손함의 모범으로 꼽은 이미지가 어린이이고 어린이의 특성을 지닌 사람이다. 어린이의 특성 몇 가지를 살펴보자.

 

어린이는 자신의 부모에 대한 절대적이고 단순한 신뢰를 가진다.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체험했던 하느님에 대한 아빠 체험은 완전하고 절대적인 신뢰를 하느님께 두셨다는 의미다. 예수님은 바로 절대적 신뢰의 태도를 어린이들에게서 확실히 발견했다. 예수님께서 권력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해야 할 말을 하고 하느님의 정의를 추구할 수 있었던 힘은 바로 하느님께 대한 무한한 신뢰에 기초한다. 어린이는 부모에 대한 단순한 신뢰를 바탕으로 두려움 없이 세상을 살아가게 된다.

 

두 번째로 어린아이에게는 세상만사가 경탄과 놀라움의 대상이다. 처음 보는 것이 지천에 널려 있기 때문이리라. 그들의 눈에 하늘의 구름과 바다의 파도와 산의 나무, 활짝 핀 꽃, 땅바닥을 기는 지렁이와 벌레 한 마리도 경이롭고 신기하지 않은 것이 없다.

놀라움 앞에 서서 황홀 속에 머물 줄 모르는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산 위에서 예수님의 찬란한 광채와 하느님의 신비를 바라본 베드로의 황홀경 속에서의 경탄이었던 초막 세 채는 바로 어린이의 마음이다.

어린이는 삶의 매순간을 황홀하게 여긴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경외심과 경이감을 갖고 받아들이라는 예수님의 뜻이 어린이와 같이 되라는 말씀 안에 담겨 있는 것이 아닐까?

경이로움은 심오한 체험이며 우리 마음대로 일으키거나 물리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열린 감수성으로 어떤 신비나 자연 현상 혹은 인간현상에 나를 내어줄 수 있을 뿐이다. 하느님을 체험하는 신비로운 의식은 이런 경외감과 경이로움의 체험과 가깝다. 그러므로 어린이는 늘 하느님의 신비를 만나고 체험하는 사람에 가깝다.

 

어린이는 낙천적이다. 놀이와 웃음과 재미가 가득하다. 근심 걱정이 자리할 틈이 없다. 아이들 둘만 모여도 까르르 웃는 웃음소리가 멈추지 않는다. 사내 녀석 둘이 뛰어 다니기 시작하면 성당 전체가 떠들썩하다. 신앙은 삶의 기쁨과 당연히 연결되어야 한다. 아이들의 쾌활함이 넘쳐나야 한다.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있기에 어떤 어려움에도 웃을 수 있고 어린이처럼 아무 근심 없이 기쁘게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어린이처럼에 어린이의 미성숙과 유치함을 애써 첨부할 필요는 없다. 하느님을 산타클로스처럼 생각해 원하는 선물을 주시는 분으로, 또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을 하지 않은데 대한 핑계로 하느님께 대한 유치한 신뢰를 사용하면 안 된다. 정의에 대한 실천 없이 그저 필요한 것은 기도뿐이라며 하느님의 뜻에 맡겨버리는 것이 그것이다.

 

오늘은 어린이처럼 겸손과 절대적이고 단순한 신뢰로 지천에 널린 자연과 삶의 경이감을 발견하고 체험하고 경탄하고 기쁨으로 활짝 웃을 수 있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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