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엽동성당

말씀과 함께, 공동체와 더불어

사제의글

2015-08-03 00:49

연중 18주 월요일

2,272
김오석 라이문도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14,16)

 

오늘 복음은 오병이어의 기적, 장정만도 5천명이나 되는 대군중을 먹이신 기적이야기다. 이 이야기에는 2개의 가치관이 충돌하고 있다.

 

먼저 제자들의 생각이다. “여기는 외딴 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마태 14,15) 각자의 능력대로 먹을 것을 해결하자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방식,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가치관이다. 각자 알아서 먹거리를 해결하도록 하면 어떻게 될까? 돈 없는 사람은 쫄쫄 굶거나 냉수나 한 사발 마시고 주린 배를 채워야 할 것이다. 반면에 있는 사람은 얼마든지 배 두드리며 포만감을 느끼도록 먹을 수 있다. 내 몫의 감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없는 사람과는 거리를 두려고 하는 보통 사람의 이기적 태도와 다르지 않다.

 

예수님의 생각은 제자들과는 달랐다.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14,16) 가진 것이라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인데 주어라? 예수님의 생각을 합리적으로 추론하자면 공동체의 정신으로 공동 해결하자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모두가 자기 먹을 것을 내놓음으로써 공동으로 해결하자는 해석이 가능하다.

사실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다. 예수님께서 놀라운 당신의 능력으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화수분에서 꺼내는 것처럼 계속 늘어나게 해 모든 사람을 배불리 먹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합리적인 생각은 자기가 먹을 것을 내놓음으로써 모두가 함께 배불리 먹고도 남았다는 해석이 매력적일 뿐 아니라 복음의 정신과도 합치한다.

 

여기서 우리는 이 놀라운 기적의 출발점에 대해서 묵상해야 한다. 그것은 수많은 군중을 바라보는 예수님 마음에 일렁이는 측은지심이었다. 측은지심의 실체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과 마음을 나누는 공감 능력이다. 측은지심은 사랑 실천의 원천이 되는 감정이다. 배고픈 사람을 만나면 함께 굶을 수 있어야 진정한 공감을 이룰 수 있다. 남아도는 것의 나눔이 아니라 내가 나의 먹을 것을 내어주고 상대의 배고픔을 나누어 받을 수 있는 마음이 공감의 태도이고 사랑의 출발점이 된다.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의 현실을 돌아보자. 지구상의 모든 자원(식량, , 기타 자원)은 잘 나누면 절대 부족하지 않다. 하느님께서는 조화롭게 세상을 만드셨고, 인간과 온갖 생명이 제 명대로 살도록 충만한 세상을 창조하셨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이다.

문제는 욕망에 눈이 먼 인간들이 필요 이상으로 자기 몫을 챙기고, 축적함으로써 마땅히 누려야 할 자신의 몫을 박탈당하는 사람이 생기게 되었다. 성녀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느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안 주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전해주어야 할 인간이 가로챘기 때문에 세상에 굶주림이 있는 것이다.”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먹을 것을 주지 않으면 그대가 그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사목헌장 69)

 

다른 사람 몫까지 차지하고서 나누지 않는 사람은 먼저 자기 몫을 갖지 못한 이웃에게 고통을 주고, 다음에는 필연적으로 그 자신을 썩고 병들게 한다. 참된 선행은 내게 남은 것을 강아지에게 던져주듯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먹을 나의 몫을 내어주는 것이다. 나의 배부름을 가난한 이웃과 나누고 동시에 이웃의 배고픔을 나누어 받는 것, 이것이 참된 선행이며 공덕이다. 정말 필요한 이웃 사랑은 함께 먹기에 앞선 함께 굶기이다. 그리하여 함께 배고픔을 겪으며 공감할 때 정신적 풍요로움이 충만해진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은 모든 사람을 배불리 먹인 기적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배고픔의 고통을 공유하고 나눈 기적이라 하겠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아멘.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