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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엽동성당

말씀과 함께, 공동체와 더불어

사제의글

2015-07-30 23:10

연중 17주 금요일(성 이냐시오 로욜라 사제 기념일 7.31)

2,156
김오석 라이문도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마태13,54)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태 13,57)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자신들 앞에 나타난 예수님의 지혜와 기적의 힘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한다.(57) 왜 그랬을까?

 

고등학교 졸업한지 30년 만에 동창 모임에 나간 적이 있다. 오랜 만에 만난 동창들이었지만, 모두가 다 정겨웠다. 30년의 세월이 흘러서 모습은 많이 변했지만 각자의 얼굴에 남아있던 사춘기 청소년 시절의 풋풋함이 그대로 옛날을 기억하게 했고, 스스럼없이 말문을 트고 대화할 수 있었다. 쉽게 말하자면 까까머리 하고 다니던 그 시절 그대로 돌아가 30년의 세월을 뛰어넘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누구도 신부가 된 나를 어려워하거나 어색해하거나 말을 더듬거나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물론 이미 늘 섬김을 받는데 익숙해 있던(?) 나만 혼자서 마음으로 어색해 하고 당황스러워 했던 기억이 오늘 예수님이 고향에서 괄시받는 모습과 겹쳐 생각난다.

 

다 알고 있다는 익숙함이 때론 사람이나 사물 혹은 상황의 진실을 바로 보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으면 좋겠다. 편안함과 익숙함이 때로는 신비를 지나칠 수도 있음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남편, 혹은 아내 그리고 부모와 자녀를 사랑하고 존경하는가? ()의 사소한 흉허물과 인간적 부족함 그리고 습관이나 생각 모두를 다 알기에 생각만 해도 짜증나고 귀찮아지는 것은 아니기를.

 

인간은 그 자체로 신비다. 하느님의 놀라운 창조의 신비가 인간 안에 오롯이 담겨 있고, 인간의 마음은 아직 과학적으로 논리적으로 해명되지 않은 신비의 영역이다. 내가 내 배우자의 몸을 만질 때 하느님의 신비를 어루만지고 있음을 알아챈다면 저절로 감사의 기도가 흘러나올 것이다. 내가 내 아이들의 머리에 손을 올려 축복할 때 아이들 안에 있는 하느님의 영을 만나는 것임을 안다면 아이들을 존경하고 진정 섬길 수 있으리라.

 

예수님에 대한 익숙함 때문에 예수님의 진면목을 볼 수 없었던 나자렛 고향 사람들의 눈먼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이 익숙한 듯 느껴지고, 그분이 늘 반복되는 신앙생활의 되돌이표가 되어 진부하게 느껴지면 내가 지금 예수님을 거부하고 슬프게 하고 있음을 깜짝 놀라며 반성해야 한다. 예수님은 그리 만만한 분이 아니시다. 양파처럼 그 겉을 계속 벗겨도 쉽게 그 속에 다다를 수 없는 신비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방식이 신기하고 희한한 방식으로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 가운데 너무도 익숙한 인간적 방식으로 다가오신다는 사실이다. 주님께서는 나의 익숙한 삶의 자리에서 나를 만나시기 위해 다가오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무리 예수님이 우리 곁에 다가오셔도 또 아무리 좋은 그분의 말씀일지라도 그분을 만나려 애쓰지 않고, 그분의 말씀을 듣기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무용지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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