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엽동성당

말씀과 함께, 공동체와 더불어

사제의글

2015-07-29 00:46

성녀 마르타 기념일(7. 29 수)

2,207
김오석 라이문도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25-26)

 

삶이란 내가 원하고 바라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이것을 우리는 한계상황이라 한다. 능력이 부족하든 혹 지혜가 없어서이든 살아 숨 쉬는 사람은 누구나 높고 두꺼운 벽 앞에서 망연자실 넋을 잃게 되는 상황과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 인생이다. 특히 죽음은 누구에게나 보편적 실재이고 인간이 죽음 앞에서 겪게 되는 한계는 절대적이다. 죽음은 현재의 모든 것과 영원한 단절을 필연적으로 동반하기에 사랑하는 이의 죽음 앞에서 인간은 슬픔의 눈물을 쏟아 낼 수밖에 없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그 여동생과 라자로를 사랑하셨다.(요한 11,5) 그런데 사랑하는 라자로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도 예수님은 금방 자리를 털고 일어나 베타니아의 그에게 가지 않으시고 이틀이나 더 계시던 곳에 머무르셨다(요한 11,6)고 복음은 전한다.

 

마르타는 예수님이 동네 어귀에 이르기도 전에 원망(?)을 가득 품고 예수님을 마중 나간다. 왜 원망스럽지 않겠는가? 자기들을 특별히 사랑하는 예수님이셨고, 세 남매 역시 마음으로 사랑하던 분이 예수님이셨는데... 그 예수님의 놀라운 치유 능력은 익히 알고 있었는데도 이틀이나 더 지체하시다가 오시는 예수님이 원망스럽지 않고 상처가 되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사랑하는 오빠가 벌써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으니 되살아날 가능성은 이제 사라졌다는 생각은 더욱 큰 슬픔이요 서러움이 되었으리라. 유다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다시 몸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사흘 동안은 시신 주위를 맴돈다고 믿었으나, 넷째 날이 되면 영혼이 멀리 떠나고 시신이 부패한다고 여겼기에 라자로의 죽음은 이제 불가역적인 상황이 되어 버렸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요한11,21)라는 마르타의 볼멘소리는 바로 이런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25-26) 마르타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정확하게 알아듣지 못한다. 당시 부활에 대한 대중적 신심인 마지막 날부활 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의미로 알아들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이야기의 결론을 알고 있다. 예수님은 라자로의 무덤 앞에 서시어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요한 11,43)는 말씀으로 그를 되살려 내셨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부활의 가르침을 어떻게 알아들어야 할까?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는 육체적인 죽음을 맞는다 하더라도 믿는사람의 영적 생명은 하느님 앞에서 살아있으며 당연히 세상 마지막 날에 부활할 것임을 의미한다. ‘살아서 믿는 사람의 영원히 죽지 않음은 예수님의 사랑 안에 들어가 그분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의 생명은 지금 여기서영원에 맞닿아 있기에 결코 죽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것을 믿느냐?” 우리에게 던지는 예수님의 질문이다.

 

죽음이라는 절대적 한계 앞에서 우리 모두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만다. 나의 죽음이든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든. 굳건한 믿음 안에서 영원과 맞닿기를 소망하면서 날마다 죽어 날마다 살아나는 부활의 삶을 꽃피울 수 있다면 좋겠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 그래서 그분의 사랑을 나누는 사람은 이제와 영원히 살아있음을 깨닫는 은총을 청하자.

부활이요 생명인 예수님이 우리 생명의 주인이심을 잊지 말자. 그러기에 믿는 이에게 죽음은 더 이상 절대적 한계가 될 수 없음도...

 

주님, 이 밤을 편히 쉬게 하시고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 아멘.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