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엽동성당

말씀과 함께, 공동체와 더불어

사제의글

2015-07-13 00:57

연중 15주 월요일

2,227
김오석 라이문도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

 

예수님이 주시려는 칼을 받았는가?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칼은 도대체 어떤 칼인가?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평화는,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마태 5,9)고 하신 그 평화와는 다른 평화인가? 그렇다. 단순히 삶의 여유로움과 안락함에서 느끼는 평안이나 마취된 안락함과는 다르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작년 한국 방문 때 평화는 정의의 결과’(이사 32,17 참조)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정의는 우리가 불의를 잊지 않되 관용과 협력을 통하여 그 불의를 극복하라고 요구한다.’고 하셨다.

예수님이 평화가 아닌 칼을 주시러 오셨다는 의미는 불의를 극복하기 위한 인내심과 기다림이 창자를 칼로 도려내는 아픔에 비길 수 있다는 의미로 읽고 싶다.

악을 악으로 몰아내지 않고 악을 선으로 바로잡는 일이란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리라. 언젠가 언급한 적 있지만 악을 악으로 바로잡는 일은 악의 악순환에 다름 아니다. 하나의 악을 없애기 위해 더 큰 악을 끌어들이는 일은 나 역시 악령의 하수인으로 편입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이 방식은 결코 예수님이 원하는 방식이 아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예수님께서 평화 대신 주시고자 하는 칼이란 좀 더 구체적이다. 참된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정말 잘라내야 할 것들이 있음을 분명하게 말하고 계신다.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래서 하느님 나라의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는 단호하게 잘라내야 할 것들이 있다는 말씀이다. 예수님께 맞서는 세상의 가치 앞에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될 때 취해야 할 단호함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때로는 혈육의 정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십자가를 짐으로써 겪어야 할 손해와 희생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종국에는 목숨마저 예수님을 위해 기꺼이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의 존재 자체를 온전히 예수님께 맡기지 않고는 실천할 수 없는 경지다. 한 발은 하느님께 한 발은 세상에 양다리 걸친 상태에서 이룰 수 없는 것이 예수님께서 세우시고자 했던 하느님 나라의 평화라는 뜻이다.

 

나의 발은 지금 어디를 딛고 서 있는가? 예수님인가, 세상인가?

잘라내야 할 것들 모두 끌어안고서 엉거주춤 눈치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예수님께서 내게 내밀고 있는 칼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신앙은 미래를 위한 보험이 아니다. ‘오늘 여기서선택하는 결단이며, 그 결단으로 누리게 되는 기쁨이며 평화다. 만인에게 사랑받지 못함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