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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엽동성당

말씀과 함께, 공동체와 더불어

사제의글

2015-06-17 00:33

연중 11주 수요일

2,729
김오석 라이문도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태 6,1)

 

자선은 자기의 소유를 자기의 것이라고 고집하거나 집착하지 않음으로써 삶이란 더불어 함께사는 것임을 드러내는 표지가 된다. 자선은 하느님께서 연민으로 바라보시는 가난한 이들을 하느님의 마음으로 대하는 행위이기에 내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삶으로 돌아섰다는 회개의 구체적인 표징이 된다. 그러므로 자선은 쓰고 남은 것을 힘들이지 않고 동네 강아지에게 부스러기 던져주듯 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나의 존재 자체, 생명을 내어주는 진실한 사랑에서 우러나와야 한다. 이처럼 자선이 내적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존재 자체의 행위가 될 때 하느님께는 영광을 드리는 것이 되며 자신에게는 기쁨의 원천이 된다.

 

기도란 하느님과의 대화요 만남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과의 내밀한 대화와 만남이 이뤄진다면 기도는 언제 어디서나 해야 하고 또 가능하다. 성당이나 성체조배실 뿐만 아니라 버스 안, 지하철, 식당, 공원, 안방, 부엌, 일터에서도 심지어 화장실에서도 기도할 수 있다.

기도는 아침에도 저녁에도 밥할 때도 양치질 할 때도 잠잘 때도 할 수 있다. 내 삶의 시간 전체를 기도의 시간으로 지향하고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 기도의 목적이라 하겠다. 심지어 기도하는 중에 담배피우는 것은 좀 곤란하지만 담배피우면서 기도하는 것은 훌륭한 기도의 태도가 된다. 우리의 모든 생활이 기도가 될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러나 나의 기도가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기 위한 것이라면 그 기도는 사람들을 향하는 나의 넋두리에 불과할 뿐이다. 기도란 내 마음 속 골방에 들어가 하느님과 단독으로 만나 오직 그분만을 바라보는 사랑의 시간이다.

 

언제나 참회의 기도와 연결되는 단식은 악을 멀리하고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는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행위이다. 육신의 생명을 위한 먹는 행위를 자발적으로 포기함으로써 내 영혼이 하느님 앞에서 이미 죽음에 이르렀음을 고통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 단식이다. 육신의 본성적 요구를 단절함으로써 창조의 본 모습으로 되돌아가려는 몸으로 하는 기도가 바로 단식이다. 비움으로써 충만함을 지향하는 것이고, 나의 비움이 가난한 이를 배불리는 사랑이 되게 함으로써 비움의 충만과 채움의 기쁨을 추구하는 것이 단식이다. 단식은 나의 생명을 봉헌함으로써 생명이 하느님의 것임을 절절히 깨닫는 재창조의 시간이다. 켜켜이 쌓인 세속적 욕망과 허영과 쾌락을 절제하고 하느님의 사람으로 새로 태어나는 구체적 출발이 단식이다.

 

자선과 기도와 단식은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 이 세 가지는 모두 하느님께 이르는 귀한 문이다. 이 문을 통과하려 하지 않으면서 하느님께 다다르기를 갈망하는 것은 모순이다.

 

오늘 복음은 이 세 가지를 행하되 사람들에게 드러내어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한다. 내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 자선과 기도와 단식하는 것은 하느님을 빙자해 나의 욕망을 채우려는 위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숨은 것을 보시고 기뻐하시는 하느님을 그리며 하느님과 나만의 비밀의 방에서 이 모든 것을 누리고 기뻐하는 신앙인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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