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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엽동성당

말씀과 함께, 공동체와 더불어

사제의글

2015-06-04 00:35

연중 9주 목요일

2,083
김오석 라이문도

첫째는 이것이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30-31)

 

가장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12,28)라는 율법학자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이다. 경천애인(敬天愛人) ,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모든 계명의 골자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그런데 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사랑의 이중계명이 두 가지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이 필요하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 사랑에 마음을 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하느님께서 마련해두신 원리라는 말이다.

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내 안에 있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인데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세는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해야 하는 일이다. 온 존재를 다 걸고 하는 하느님 사랑, 그리고 내 자신에 대한 사랑은 비로소 나의 존재를 다 쏟아내는 사랑으로 이웃을 향하게 할 것이다.

 

거꾸로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는 똑같은 사랑으로 사랑하시는 나의 이웃에 대한 사랑 없이 감히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20)

 

보이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실상 하느님은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고 현실 세계의 차원에서는 감지할 수 없다. 그러므로 동료 인간이 하느님 사랑을 위한 본질적인 구성요인이 아니라면 하느님은 사랑받을 수 없다. 다시 말해 이웃 사랑이 실현되는 그만큼만 하느님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하겠다.

이웃을 향한 사랑이 어떤 경우에도, 즉 가장 배척받아야 할 범죄자 앞에서도 멈추지 않을 때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다. 우리의 시선 안에서 있다가 사라지고 우리가 비탄의 눈물을 흘려야 하는 이별해야 할 것들 안에, 즉 이 세계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임시적인 것 안에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즉 극한에 이르는 마지막 사랑을 일궈낼 수 있는 가능성이 우리 이웃과의 사랑의 관계 안에 있다는 것이고 바로 이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동일시된다.

 

감당할 수 없는 삶의 무게와 고통으로 아파하고 힘겨워하는 이웃과 특별히 그중에서도 가난하고 연약하고 소외된 가장 작은이들의 손을 잡아 일으킬 때 사랑이 발생하고, 사랑이신 하느님은 바로 그 순간 맞잡은 두 사람의 손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처럼 발생하신다.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 공동번역)

하느님 또는 그리스도 때문에사랑받은 자는 사랑받는 것이라 할 수 없다. 이러한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의화의 수단으로서만 사용될 뿐이다.

 

하느님은 따스하게 주고받는 위로와 친절한 언어를 통해서, 굶주린 이에게 내어주는 한 덩이 빵 속에서, 목마른 이에게 건네주는 한 잔의 물속에서, 헐벗은 사람에게 내어주는 옷 한 벌에서, 병자를 방문하는 관심 안에서 다시 말해 우리들의 통속적인 인간적 행위 안에서 발생하신다. 그리고 이웃에 대한 전폭적인 봉사와 생명의 헌신 속에서도 하느님은 발생한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도울 때 하느님은 인간에게 가장 가까이 현존하신다.

 

보라! 하느님이 서로 사랑하는 그들 가운데 현존하신다. 하느님이 여기 계신다. 하느님이 발생하신다!”

 

메르스로 모든 사람들이 불안과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무능한 정권을 질책하기 전에 진행형인 현실적 재난을 잘 극복할 수 있도록, 그리고 의료계에 일하시는 분들, 의사와 간호사들이 두려움에 떨거나 지치지 않고 담대히 자신의 일에 매진함으로써 사랑을 발생시키고 하느님을 현존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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