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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엽동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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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의글

2016-02-12 22:31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3,236
김오석 라이문도

예수님께서는 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루가 5,27-2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가 5,31-32)

 


오늘 예수님이 지칭하신 병든 이란 단순히 육신의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 찌그러지고 오염되어 영혼이 병든 사람을 지칭한다. 안타까운 것은 영혼이 병들어 있으면서도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는 것이다.

 


인체에서 간은 심하게 나빠져도 자각 증세가 별로 없다고 한다. 피곤함이 잦고 심한듯하여 진찰 좀 받겠다고 멀쩡하게 병원에 걸어 들어간 사람이 간암 말기 진단을 받고 한 달 만에 주검이 되어 나오는 경우를 실제로 보았고 이런 일은 종종 벌어진다. 아픔을 느끼는 병은 조기 진단하여 치유와 회복이 가능하다. 그것이 육체적인 아픔이든 영적인 아픔이든 상관없다. 무자각증이야 말로 가장 심각하고 치명적인 질병이다.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에서 세리는 허가받은 강도였다. 모세의 십계명을 거의 다 위반한 죄인으로 취급받았다. 특히 이방인인 포악한 로마 식민지배세력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부정 축재했기에 민족의 배신자로 낙인찍혀 살아야 했다. 그런 세리 레위가 어떻게 예수님의 부르심에 모든 재산과 가족을 뒤에 남겨두고 예수님을 따라 나설 수 있었을까?

 


자신의 처지에 대한 깊은 자각 때문이다. 거짓과 사기, 부정과 뻔뻔스러움으로 부를 축적해 물질적으로 남부럽지 않게 되었지만, 자주 그리고 아주 깊이 자기 영혼의 상처와 아픔을 보듬고 고통스러워하고 아파해왔다는 방증이다. 어둠이 짙은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을 보며 빛바랜 자신의 별이 사라졌음을 가슴 치며 울었다는 뜻이다. 욕망의 덧없음과 삶의 공허를 아파했다는 뜻이다. 그런 과정이 없었다면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예수님을 따라 나서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돈 많이 모아 소위 상류층이네, 지도층이네 하며 사치와 향락에 몰두하는 사람치고 도덕적 인간이란 찾아보기 어렵다. 부자들일수록 가난한 사람들의 궁색한 삶에 관심이 없다. 자신들의 세계에 중독되어 가난한 이들의 삶을 모른다. 돈 많은 부자들은 이 말로 기분이 나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부동산 투기, 위장전입, 뇌물과 공금착복, 세금탈루, 권력을 이용한 이권개입, 무리한 향응 접대, 거짓말로 위장한 상술 등에 자유로운 부자가 과연 얼마나 될까? 그런 이들이 자기 영혼의 깊은 상처를 살피고 아파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파하는 사람만이 양심의 소리를,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참 좋은 의사인 예수님이 베푸는 치유의 은총은 상처를 자각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이다. 자신이 아픈 존재임을, 죄인임을 자각하는 사람만이 치유 받을 수 있다. 죄 있는 곳에 하느님의 자비도 넘쳐흐른다는 말의 의미다. 예수님은 자신의 나약함, 부족함, 부끄러움을 고백하고 아파하고 슬퍼하는 사람을 부르신다.

 


사순 시기는 나의 아픔을 드러내고 치유 받는 시기다. 자신의 아픔을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아파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시기다. 이 은혜의 사순시기에 우리의 아픔이 기쁨으로 변하도록 속을 확 뒤집어엎을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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